(서울=연합뉴스) 이상봉 객원기자 = 겨울 동장군 추위가 어제 같더니 이제는 동백꽃 소식이 남쪽에서 올라온다.
며칠전 현대무용가 홍신자 선생이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순례자'를 공연했다.
홍 선생과의 인연은 그가 주최하는 1996년 제2회 '웃는돌 무용단'의 죽산국제예술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패션 퍼포먼스라는 것을 했었다.
6월 산속의 밤. 무수히 쏟아지는 별빛 속에서 '잉태'를 주제로 무용수와 패션 모델들에게 흰 무명 의상을 입히고 물감을 담은 큰 항아리에 몸을 담그게 해 옷을 물들이는 다분히 원시적이고 샤머니즘적인 퍼포먼스였다.
필자 또한 1990년대 후반 서울에서 연 컬렉션에 홍 선생을 오프닝 퍼포먼서로 초청한 적이 있다. 홍 선생은 당시 축복의 의미에서 관객들에게 꽃을 던져주면서 컬렉션의 무대를 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이런 홍 선생과의 인연이 무용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몇몇 무용가와 무대 의상작업을 하게 됐다.
2000년대 초반 파리 컬렉션 무대에 정식으로 데뷔하고 난 뒤 '이상봉'이라는 이름 석자를 제대로 알렸다고 생각했던 컬렉션은 2003년 10월 파리 프레타포르테였다.
<<2009년 2월 공연된 홍신자 안무의 '순례자'>>
'한국의 샤머니즘'을 주제로 한 이 무대는 서양인들이 오리엔탈리즘으로 바라본 수동적이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이 아니라, 한국의 무당에서 영감을 얻은 색동옷을 섹시하고 원시적이며 거친 느낌으로 선보였다.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서 무속인 이혜경이 칼을 들고 춤을 추는 퍼포먼스로 시작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무모했다. 하지만 값진 경험이었고, 무용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난해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는 프랑스 조엘 부비에 무용단이 쇼윈도에서 살아있는 마네킹 퍼포먼스를 할 때도 흔쾌히 컬렉션을 제공했고, 재작년에는 한국의 춘향전을 소재로 만든 미하일 포킨의 발레 '사랑의 시련'이 서울발레씨어터에 의해 복원되어 처음으로 선보일 때 초연 당시 중국풍으로 제작되었던 의상을 한국적인 색채로 다시 만드는 일에도 참여했다.
무용 의상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어 컬렉션을 만든 일도 있었다. 2008년 봄여름 파리컬렉션을 준비할 때는 1920년대 독일의 주요한 바우하우스 운동가인 오스카 슐레머의 'Das Triadische Ballet'의 전위적인 의상을 쿠튀르적인 색채를 가미해 컬렉션으로 만들고, 전체의 분위기를 바우하우스의 도형(동그라미, 삼각형, 사각형)을 모티브로 삼아 건축적이고 조각적인 컬렉션으로 선보였다.
이렇게 무용과 패션이 교감을 하는 일은 언제나 신선한 도전이지만, 시간 부족으로 완벽한 무용복을 선보이지 못한 아쉬움, 혹은 무대 의상이란 분야에서 안무가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누를 끼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안무가와 연출자의 의도는 물론, 무대와 조명, 그리고 의상이 어우러져야 관객에게 전달되는 감동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용수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의상이 어떻게 디자인돼야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년전 모스크바에 초대되었을 때 볼쇼이, 키로프 발레단의 의상을 제작하는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철저한 통제나 보안도 놀라웠지만, 작업실에서 본 의상들이 거의 오트 쿠튀르에 가까운 봉제능력으로 만들어져 있고, 수없이 쌓인 의상들, 실크 위의 핸드 페인팅은 오랫동안 의상을 만들어 온 필자로서도 놀랄 만했다.
그 작업실의 책임 디자이너는 15년차의 베테랑 디자이너였고, 여러 명의 디자이너들과 수작업을 담당하는 많은 분들이 파리의 의상실에서 일하는 분들처럼 연륜이 묻어났다.
그 뒤로 전문 무대의상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정말 제대로 된 무대 의상을 언젠가는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게됐다.
<<2009년 2월 공연된 홍신자 안무의 '순례자'>>
올해는 지난 1997년 발표된 후 전세계를 돌며 관객과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홍 선생의 '순례'가 12년만에 새롭게 공연되면서 의상 디자인에 참여 할 수 있었다.
지난 2월 8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의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지만, 필자의 영감의 원천은 바로 이러한 예술과의 교감이라고 생각한다.
일과 사랑과 예술의 열정은 별개가 아니다. 나에게 패션은 '영원'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자, 연극을 사랑했지만 무대 초연을 앞두고 도망쳤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에 전하는 위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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